허정찬 기자
전 세계 가상화폐 시장을 뒤흔들며 약 400억 달러(약 58조 원) 규모의 시가총액을 증발시킨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인물 권도형(34) 전 테라폼랩스 대표가 미국 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검찰이 플리바게닝(유죄 협상)을 통해 요청한 징역 12년보다 더 무거운 형량으로, 법원이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매우 엄중하게 판단한 결과로 풀이된다.

1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남부연방법원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폴 엥겔마이어 판사는 권 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고, 범죄 수익 1900만 달러(약 279억 원)의 몰수를 명령했다.
재판부 “한 세대에 남을 거대한 사기”… 검찰 구형보다 높은 형량 선고
이날 엥겔마이어 판사는 판결문을 통해 이번 사건을 “전대미문의 사기(epic fraud)”이자 “한 세대에 남을 만한 거대한 규모의 사기”라고 규정했다. 그는 “권 씨의 범죄는 단순한 장부상의 손실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에게 40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며 “피해자들은 은퇴 자금을 잃고, 병원비와 학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심각한 고통 속에 놓이게 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번 선고는 검찰과 피고인 측의 합의를 뛰어넘는 이례적인 판결로 주목받았다. 앞서 권 씨 측은 검찰과의 플리바게닝을 통해 최대 12년형을 제안받았고, 변호인은 한국 내 추가 기소 가능성과 몬테네그로 구금 생활 등을 이유로 징역 5년 이하의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엥겔마이어 판사는 “검찰이 요청한 12년형조차 터무니없이 관대하며, 변호인 측이 요청한 5년형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부당한 요구”라고 일축했다. 재판부는 권 씨에게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검찰 구형보다 3년 더 높은 15년형을 확정했다. 다만, 권 씨가 몬테네그로에서 수감되었던 17개월의 기간은 형량에서 감형받게 된다.
수척해진 권도형 “모든 책임 지겠다” 사과
이날 푸른색 수의를 입고 손에는 수갑, 양발에는 쇠사슬을 찬 채 법정에 들어선 권 씨는 지난 1월 몬테네그로 송환 당시보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며, 모든 고통의 책임은 오롯이 나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어 “법원이 어떤 형량을 내리든 기꺼이 감수하겠다.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권 씨가 진술을 마치자 변호인이 그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코인 거물’의 몰락과 향후 거취는?
스탠퍼드대 출신 엔지니어였던 권 씨는 2018년 테라폼랩스를 설립하고 스테이블 코인 ‘테라’와 자매 코인 ‘루나’를 발행하며 가상자산 업계의 거물로 떠올랐다. 그는 테라가 미 달러와 1:1로 안정적으로 연동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알고리즘 조작 등 허위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2022년 5월 가격이 폭락하며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혔고, ‘크립토 윈터(가상자산 침체기)’를 촉발했다.
이번 판결로 권 씨가 받게 된 15년형은 유사한 대형 금융 사기 사건들과 비교될 만하다. 고객 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징역 25년을 선고받은 FTX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보다는 낮지만, 14조 원대 투자 손실을 낸 아케고스 캐피털의 빌 황(징역 18년)과 유사한 수준의 중형이다.
한편, 권 씨의 향후 거취에도 관심이 쏠린다. 미 검찰과의 플리바게닝 조건에 따라 권 씨가 미국에서 형기의 절반 이상을 복역하고 모범적인 수형 생활을 유지할 경우, 해외 이송 신청을 통해 한국으로 송환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하지만 한국 검찰 역시 그를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한 상태여서, 귀국 후에도 추가적인 법적 처벌과 재판이 불가피할 전망이다.